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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은 맛보지 못했던 맛입니다.

적어도 봄이 여름을 돌아 여기에 오기까지는 감히 엄두를 낼 수도 없었습니다.

사우나에서 한 땀을 우려내고,

땀범벅을 찬물로 씻겨 낼 때 얼추 비슷한 맛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맛에는 비길 바가 아닙니다.

알싸하고 개운한 맛, 그것은 가을의 맛입니다.

알싸하고 개운한 가을날이 마냥 행복합니다.




집값이 곤두박질을 쳐서 몇 달째 그 모양 그 타령입니다.

강남권재건축아파트라는, 그래서 투자가치가 있다는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썰렁하기

만 합니다. 거래라고 해봤자 한 달 내내 급매물 여 남은 건이 고작이어서 집값이 오

르기는커녕 늘 상 제자리를 맴돕니다. 추석이 지나서도 바닥을 쳤다는 둥 더 이상 추

락할 데가 없다는 소리만 요란할 뿐 매수세가 살아나는 기척은 쉽사리 찾을 수가 없

습니다.




투자심리가 위축되고 시장상황이 좋지 않아 그렇지 요고비만 넘기면 지금보다는 나

아질 거라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못해도 설마 지금보다야 났지 않겠냐는 생각입니

다. 재건축진행은 더욱 속도를 낼 것이고 회복세에 접어들었다는 소리가 심심치 않으

니 금 새 좋아지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팔더라도 그때까지는 기다려보고 팔겠다는 생

각입니다.

대부분의 집주인들 생각이 그렇습니다.




그 모양 그 타령으로, 급매물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시장에 급매물이 귀한 이

유입니다. 가을에는, 혹은 연말에는 시장이 다소 나아지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당연

하게 급하게 서둘 일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팔 때 팔더라도 헐값에는 팔고 싶지 않다

는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제대로 된 값을 쳐서 팔 기회가 오지 않겠냐는 것입니

다.

강남권재건축아파트 중에서 최고라 할 수는 없어도 투자효율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

울 정도인 둔촌주공인데, 말입니다.




H씨는 집을 팔기로 했습니다.

급매물이 아니면 팔리지도 않는다는데도 다른 도리가 없어섭니다. 조금만 지나면 지

금보다 나아질 것은 분명한데도 당장 한 달 한 달이 버거워 고심 끝에 아내와 의논해

서 결정한 일입니다. 재건축 후 가치는 차치하고서라도 지난 1월 거래가 보다 1억이

떨어진 8억5000만원에 급매물로 팔기로 한 것이니 억장이 무너질 지경입니다.




H씨는 10년전 만 하더라도 잘나가는 대기업의 50대 초반의 간부였습니다.

50년 초반의 전후 세대이니 요샛말로는 베이비부머인 셈입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버젓한 강남권아파트에 아이들 둘 다 미국 유학까지 시켰

으니 세상 꿇릴게 없는 당당한 가장입니다. 비록 아이들 학비 때문에 쪼들리기는 했

어도 직장 빵빵 하겠다 모아 논 돈도 제법 있어서 직장만 정년까지 잘 버티면 그다

지 큰 걱정도 없는 그야말로 해피한 축에 속합니다.




금융위기로 갑자기 회사를 그만둘 때만 해도 그리 크게 낙담할 정도는 아니었습니

다.

버젓한 아파트 있겠다, 퇴직금 있겠다, 많지는 않아도 모아둔 돈도 있겠다. 뭐가 걱

정이랴 싶었습니다. 퇴직금으로 조그만 음식점이나 내서 열심히만 하면 네 식구 먹

고 사는 거야 뭐가 걱정이랴 싶었습니다. 떼돈이야 벌 자신은 없어도 남들만큼은 잘

해낼 자신이 있어 오히려 직장 때려 치는 게 잘됐다 싶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꼬박

이년을 발품을 판 끝에 압구정동에 꽤 규모 있는 냉면집을 열수 있었습니다. 종업원

도 10명이나 고용했으니 웬만한 소기업인은 되는 셈입니다. 일확천금까지는 아니라

도 장밋빛 꿈을 안고 시작한 냉면집은 생각만큼 잘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현상유

지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좋아져야할 가게는 자꾸만 매상이 줄어

들더니 얼마가지 않아 가게 임대료와 종업원 급여 날을 걱정해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퇴직금은 이미 바닥이 난지 오래고 선친에게 물려받은 시골의 손바닥만 한

땅 마저도 어려운 가게를 운영하는 비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끌

고 가기를 몇 년, 결국 아파트를 담보로 받은 대출금은 늘어만 갔습니다.




정확히 2년 전 냉면집을 접었습니다.

헐값에 다른 사람에게 권리를 넘기고 나섭니다.

더 이상 적자를 감당하지 못해서이지만 막상 가게를 접고 나니 앞길이 막막하기만 합

니다.

매달 대출금이자 때문에 추가 대출을 얻어야 했습니다.

내년 초에는 큰 애 결혼날짜도 잡혔습니다.

결혼을 좀 더 늦추라고도 하고 싶었지만 혼기를 놓치면 더욱 난감한 상황이 될지 몰

라 그 말은 차마 입 밖에 꺼낼 수도 없었습니다.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일단 대출금을 갚고 아이 결혼자금도 마련할 생각입니다.

아파트 판돈의 일부를 떼어내 내외의 노후대책도 마련해야 합니다.

머리가 부서질 듯 죄어오고 가슴이 아립니다.

안타깝게도 해결방법은 이길 뿐입니다.




남의 얘기 같지 않은, 어느 베이비부머의 얘깁니다.

가슴 아픈 사연의 급매물 얘기입니다.





[둔촌주공 동향 한줄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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