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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현직 교사의 현장체험기] ‘달라진 교실’

경기도 일산의 名門 백석고, 평준화 3년이 남긴 것

월간중앙 2004년 3월호
외부기고자 조의구 백석고등학교 교사(euyguj@hanmail.net)   

“토론식 수업은 엄두도 못 내죠, 똑똑한 아이들은 특목고로 떠나고…”

올해는 고교 평준화 실시 30년이 되는 해다. 이제 다양한 문제점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국가적 교육정책이나 경제정책 수립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기에 이르렀다. 나는 교육학자도 아니고 교육에 대해 깊이 연구한 사람도 아니지만 이 시점에서 평준화가 우리 교육 전반에 어떤 변화를 주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곳에 진술한 일들은 내가 속한 학교의 교육 여건 등이 다른 곳과 달라 지엽적이고, 편향적이며, 제한적일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경기도 고교 평준화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지 만 2년이 지났다. 경기도는 지역적으로 서울의 교육 환경 변화에 가장 민감한 영향을 받는 지역이다.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교육 환경은 서울과 비교도 안 되게 열악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학생이나 학부모들의 눈높이는 똑같아서 많은 갈등들이 생겨났다. 

수도권 인구 분산 정책에 의해 일산 신도시가 개발되기 이전 이 지역은 서울로 떠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호구지책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곳이었다. 대학 진학률을 비롯해 전반적인 여건이 말할 수 없이 낙후했으며, 학교라는 의미 자체가 없는 교육 불모지였다. 

그러던 중 1990년대 수도권 인구분산 정책에 따라 서울의 위성도시로 일산에 신도시가 형성되었고, 자연스럽게 이 지역을 대표하는 백석고는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명문 학교로 성장했다. 지난 2000년 모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모 대학이 입학 사정을 위해 수능 성적을 원자료(raw date)로 매긴 고교 서열에서 본교가 대구외국어고에 이어 2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대학은 대원외국어고나 대전외국어고 등 일부 특목고보다 본교의 학력수준을 더 높게 평가했다. 

본교의 우수한 학력이 알려지면서 서울에 거주하는 많은 학생들이 평준화된 서울의 고교 대신 경기도 지역으로 역(逆) 전입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평준화에 불만이 많던 일부 상위권 학생들이 비평준화 지역인 경기도의 세칭 명문고에 진학하기 위해서였다. 경기도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긍정적인 상황 변화였다. 경기도 일산·분당 등지에 형성된 신생 명문고는 강남의 집값 상승과 교육 수요를 상당부분 흡수하는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급격한 도시의 팽창에서 오는 학부모들의 다양한 교육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갈등이 빚어졌고, 그 과정에서 교육부는 매우 쉬운 해답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고교 평준화였다. 이에 따라 2002학년도부터 경기도 5개 도시에 평준화 제도가 도입됐다. 경기도 지역의 평준화를 추진하면서 교육부가 근거로 제시했던& nbsp;것이 ‘평준화를 실시해도 학력이 하향평준화되지 않고 오히려 올라갔다’는 한국교육개발원의 2001년 연구발표 자료다. 

평준화 이후 달라진 교실

이 같은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혹자는 평준화되면 일부 특정 학교가 독점하던 고득점 학생들이 여러 학교로 분산되면서 일산 지역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학력 신장이 이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그런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비슷한 학력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수준별로 수업을 진행할 경우와 이해 정도가 천차만별인 학생들을 모아 놓고 수업할 경우, 수업 분위기와 수업 진행 방법 등에서 엄청난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내가 가르치는 수학 과목의 경우는 그렇다.

학력 수준이 비슷한 학생들끼리 모인 집단의 경우 토의학습이나 공동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등 다양한 교수법을 활용하는 것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또 학생들의 학력 수준이 비슷하기 때문에 50분의 수업 시간 동안 다양한 응용문제나 심화문제를 풀 수 있다. 

가르치는 교사 입장에서도 신바람이 난다. 운이 좋았는지, 나는 28년 전 처음 교편을 잡은 이래 백석고에서 9년, 의정부여고에서 7년 등 지난 16년을 선발 집단이 모인 학교에서 근무했다. 선발된 아이들이어서 그랬겠지만, 어떤 문제를 내도 기막히게 잘 풀었다. 수학 문제를 내면 서로 자청해 풀겠다고 손을 들었다. 나도 한 문제라도 더 어려운 문제를 가르치기 위해 밤을 새워 공부했다. 

그러나 학력 수준이 천차만별인 학생들이 섞여 있는 집단은 가장 쉬운 수준의 문제부터 상위 수준의 문제까지 단계별로 풀어야 하기 때문에 50분 동안 풀 수 있는 문제가 몇 안 된다. 가장 쉬운 수준의 문제 한 개를 한 시간 동안 푼다고 해도 한 반 학생 전부를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매우 유능한 교사라도 정해진 시간에 동일한 학력 수준의 아이들을 모아 놓은 집단과 같은 양의 수업을 진행할 수 없고, 설령 그렇게 진행한다고 해도 학업 성취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학력에 관한 한 평준화 집단은 비평준화 지역의 선발 집단의 학력과 비교되지 못한다. 비록 학력이 낮은 학교에 입학했다고 해도 수업 목표를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비평준화 지역이 높은 학업 성취도를 나타낸다.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들

 충분한 교사가 확보되고 교실이나 수업에 필요한 조건이 확보되면 그나마 학생들에게 알맞은 특별한 교육 방법을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조교실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특별실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수준별 이동수업조차 할 수 없는 시설에서 능력별 수업은 불가능하다. 교사는 교사대로 수업 시간마다 학력 수준이 모두 다른 학생들을 위해  카멜레온을 닮은 탤런트가 돼야 하고, 학생들은 학생대로 만족할 수 없는 지루한 수업에 짜증만 낸다. 

비평준화 시절 시도했던 토론식 수업도 평준화 이후에는 불가능해졌다. 평준화 실시 이후 오히려 초지일관 주입식 교육으로 교수법을 바꾸는 교사가 많아졌다. 나도 한 교실 내에서 수준별로 그룹을 지어 보기도 했지만, 진도를 나가기도 어렵다는 결론에 봉착했다. 최하위 그룹을 위해 한 문제를 푸는 데 50분의 시간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 동안 중상위권 학생들은 지루해 몸을 뒤틀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드는 수업을 하고 나와도 학생들을 만족시킬 만한 수업 방법이 없어 안타까움이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학생에게 기준을 맞춰 수업해야 하는가. 교사·학부모·학생 누구에게도 만족을 줄 수 없는 이 제도가 과연 입시 지옥을 사라지게 했다고 자랑할 만한 일인가.

2001년 교육개발원이 발표한 연구 결과는 비교 집단이 잘못되었거나 평준화 지역의 사교육비 덕분임이 확실하다. 본교의 수업에서도 비평준화 집단일 때의 수업량과 평준화 집단일 때의 수업량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상위권 학생이든, 하위권 학생이든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이 모인 교실에서는 학생 수준에 맞는 수업을 할 수 있다. 평준화된 교실에 비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이 적다는 얘기다. 그러나 평준화된 교실은 수준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수업을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이 생길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중간 수준 아이들에 맞춰 수업하는데, 이렇게 해도 한 교실에 7∼10명 정도의 학생들은 수업을 따라오지 못한다. 

아침 7시부터 저녁 10시까지, 하루 12시간을 이해할 수 없는 수업을 듣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고역도 없을 것이다. 이런 학생들은 학업 자체에 흥미를 잃고, 비슷한 아이들끼리 어울리게 된다. 또 공부 잘 하는 친구들에 대한, 교사들에 대한 반발 심리 비슷한 것이 생기는 것도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자신의 수준의 맞는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면 학업에 흥미도 잃지 않았을 것이고 탈선할 이유도 없었을 아이들이 공부 잘 하는 아이들 틈에 끼어 자신감을 잃고 공부에 흥미도 잃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한다. 이런 예는 본교에서도 발생했다.

평준화가 처음 실시된 2002년도 입학생 가운데 실업계 고교에 지원했다 떨어진 학생 40명이 본의 아니게 본교에 배정받은 일이 있었다. 일산 지역에서는 매년 중학교 졸업생 가운데 200~300명이 서울의 외국어고·과학고 등 특수목적고로 진학했다. 그런데 평준화가 실시되면서 그 해에만 600명이 서울의 특수목적고 등으로 빠져나갔다. 일산 지역 인문계 고교에는 약 400명의 정원 미달이 발생했고, 실업계 고교를 지원했다 떨어진 학생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본의 아니게 인문계 고교에, 그것도 최 상위 수준의 학생들이 모인 학교에 배정받은 이 아이들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나름대로 이 아이들의 적응을 돕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또 교과를 조절하는 데만 거의 한 학기를 소비해야 했다. 몇몇은 실업계 고교로 전학하기를 희망했지만 그 역시 쉽지 않았다. 인문계 고교에서 실업계 고교로 전학하고자 해도 두 학교가 같은 학군 안에 있지 않으면 전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평준화 실시 의도와는 반대로 오히려 학습 의욕을 잃고 타 시·도의 학교로 전학하거나 교내 폭력으로 생활지도 대상자가 되었다.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가슴 아픈 아이도 있었다. 다행히 본교에 적응한 아이들은 축구 등 특기 적성시간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수업 시간에는 여전히 겉돌고 있다. 개인차를 인정하지 않고 실력과 적성을 무시한 무작위 배정으로 공부에 적성이 맞지 않는 아이들이 공부만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겪었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교사로서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