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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필요한 사람들만 더 배우면 된다
민사고, 우리말 쓰는 시간 오히려 늘어나"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칠순을 넘긴 이돈희 민족사관고등학교(민사고) 교장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쪽의 교육정책 추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교장은 위의 말을 반복할 때마다 미소를 지었다.

이 교장은 "서두르지 말라"는 말을 자신에게도 던진 듯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비판했지만 격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가끔 마른 기침을 했지만, 나직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끝까지 했다. 이 교장을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자택에서 만났다.

특히 이 교장은 인수위의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에 관한 질문에는 민사고의 경험을 빗대며 길게 이야기했다. 인터뷰를 풀어보니 A4용지 한 장이 넘는 분량이었다. "왜 온국민이 같은 수준의 영어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게 이 교장의 문제 의식이다.

참고로 '전교 1등 중의 1등'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민사고는 국어와 국사를 빼고 모두 영어로 수업을 한다. 뿐만아니라 학생들은 주말을 제외하고는 모두 영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왜 모든 국민이 똑같은 수준의 영어를 해야 하나"

1937년 태어난 이 교장은 50년을 교육계에서 보낸 원로다. 교육학을 전공했고,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인 지난 2000년에는 교육부 장관을 맡기도 했다. 장관 출신 교장이다.

최근 강남 대치동의 한 학원장은 기자에게 "대한민국 건국이래 전국민이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처럼 격렬하게 교육을 토론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교육을 말하는 사람은 어느 때보다 많은데 희망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보이지 않는 희망을 애써 찾으려 이 교장을 만난 건 아니다. 다만, 오랜 경험은 때로 훌륭한 나침반 되어 준다. 이 교장의 말은 그런 측면에서 경청할만하다.

아래는 이돈희 교장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 권우성 이돈희

-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교육정책으로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다. 어떻게 보나.

"영어 교육 강화, 학생 선발권 대학 이양, 특수목적고와 자율고교 확대, 그리고 중앙정부가 가지고 있던 권한을 지자체로 이양한다는 것인데…. 전체적 프로그램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너무 서두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이명박 당선인이 선거운동 과정에서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니까, 그것을 이행하는 노력은 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공약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어떤 절차를 통해야 하는지, 어떤 시기에 공약을 완성되도록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전략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막 밀어붙이면 되는 것인가, 그런 기분을 들게 한다. (교육 정책의) 기본 방향은 수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책을 추진했을 때) 예상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조치를 취하느냐를 고려하면 점차적으로 수행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 인수위에서 제시한 교육정책 로드맵을 보면 모든 것을 임기 내에 하려는 것 같다.

"하려면 할 수 있다. 그러나 시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부작용, 저항들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 박원순 변호사와 최현섭 강원대 총장 등 사회 원로들이 새로운 교육정책을 위한 사회적 합의체를 구성하자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게 쉽게 될까? 구성 자체도 어렵고, 협의체에 누굴 참석시키느냐는 인적 구성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대통령 당선인이 국민의 지지를 통해서 당선됐으니 그쪽에서 책임지게 하는 게 옳다. 다만 당선인 쪽이 책임지는 과정에서 그냥 내버려 두면 어디로 갈 지 모르니까 견제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 교육부장관을 지낸 뒤 대학 총장 제안이 있었을 텐데 굳이 민사고를 선택한 이유는?

"처음에는 서울대 교수 퇴직하고 그냥 쉬고 싶었다.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공부나 할까 했는데, 민사고 교장 제의가 들어왔다. 갑자기 들어온 것은 아니다. 과거 교육개발원(이하 개발원)장할 때 최명재 전 파스퇴르유업 회장이 민사고를 세웠는데, 개발원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학생 선발, 학교 경영 같은 걸 연구지원 해줬다. 또 서울대 교수들과 함께 자문교수단 같은 걸 구성해서 도와줬다. 그게 인연이 됐다."


- 오랫동안 대학과 행정에만 있었는데, 고등학교에 가보니 어떤가.

"장관할 땐 말단 직원들과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주로 국장급과 실장급 사람들을 만났다.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문제는 잘 모른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가니까, 게다가 민사고가 규모가 작으니까 모든 걸 다 봐야했다. 학생과 교사의 문제, 시설 문제, 학부모 문제… 이런 걸 전체적으로 보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 어떤 점에서 가장 큰 차이를 느꼈나.

"글쎄, 민사고 사정을 다른 학교와 똑같이 일반화 하기는 어렵다. 민사고는 사립형 사립고라서 제도가 다르고, 아이들도 많이 다르다. 다만 나름의 학교 프로그램을 갖고 운영하다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을 경험했다.

예전에 1학년에 입학한 지 두 달 된 아이가 복도에서 교감 선생님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라. 왜 그런지 알아봤더니 '외고에서는 수준 높은 영어 하는데 왜 우린 안 하느냐' '나는 생물학 공부를 어떤 수준 이상으로 하고 싶은데 왜 안 하느냐'는 것이다.

조금 색다른 경험이었다. 우리 학교는 1학년 때까지 국민공통교육과정을 따른다. 2, 3학년이 되면 학교가 계발한 자율적 교과가 있지만 1학년은 법적 과정을 지킨다."

"지역할당제 해도 강남 일산 분당 등 수도권이 60%... 사교육 탓"

- 1학년을 마친 뒤에 영재 교육을 시작한다는 것인가.

"대학교처럼 과목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무학년 교육 과정도 있다. 올해는 국제반과 민족반을 나누지 않고 무계열 교육 들어간다. 따라서 아이들이 자기 교육과정을 자기가 만들어 간다. 국민공통교육과정은 고교 1학년까지 해야하니까 그 부분은 약간 조정이 있다.

예를 들면 우리 학교 학생들이 영어를 아주 잘한다. 토플 점수가 굉장히 높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에게 고교 1학년 영어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하라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그래서 이수인증시험이란 게 있다. 고1에 해당하는 10학년짜리 영어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이걸 패스하면 영어 과목을 이수한 것으로 해준다. 그렇다고 과목 공부 자체를 면제해주는 게 아니라 상위과목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 학력 양극화가 심각하다. 민사고의 지역별 학생 분포는 어떤가.

"그게…(잠시 말을 멈춤) 이번에 졸업하는 아이들은 60%가 수도권이다. 그중 대부분이 강남, 분당, 일산 지역의 학생들이다. 올해 3학년 올라가는 학생들 중 70%가 그 지역 출신이다. 그리고 2학년 올라가는 학생들 중 약 80%가 역시 그 쪽에 산다. 이렇게 이들 지역 출신의 비율이 학년마다 올라갔다.

그래서 올해는 우리가 지역균형선발제도를 통해 정원 50%를 인구 비례에 맞춰서 지역에 할당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60%가 강남, 분당, 일산 등의 수도권 출신이다. 영재가 그 지역에만 몰려 있는 건 아니다. 영재는 전국에 흩어져 있다. 지방의 아이들이 사교육의 혜택을 덜 받고 개발이 안됐을 뿐이지 잠재력은 있다고 본다. 우리 학교가 민족 지도자 육성을 표방하는데, 지도자는 지역 구석구석에서 나와야 한다."

- 그렇다면 왜 이렇게 강남, 분당, 일산 출신들이 많다고 보나.

"사교육 서비스를 받아서 그렇다. 내가 처음 민사고에 갔을 땐 학교에서 학원 원장들이 자주 보였다. 왜 저 사람들이 보이나 했는데, 학생 선발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 오는 것이었다. 또 어떤 학원은 민사고 입시 설명회를 열어줄테니 참석만 해달라고 하다라. 학교 설명회는 학부모와 졸업생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알아서 한다. 그래서 지금은 학원 원장들이 학교 주변에서 잘 안 보인다.

우리는 되도록이면 사교육 영향을 적게 받은 학생을 '원목'이라고 부르는데, 원목을 찾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학원에서 만들어진 학생들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잘 계발된 학생들도 있지만, 사실 능력도 없는데 만들어진 학생이 있고, 잠재력은 대단한데 학원에서 학습 습관을 잘못 들여서 망쳐버린 학생도 있다.

될 수 있으면 학원의 영향을 덜 입은 학생들을 찾으려고 여러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영재판별검사를 실시하는데,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자료다. 그런데 우리가 실시한 것들이 어느새 입시 학원에 쫙 퍼지곤 했다. 그래서 해마다 검사의 내용이나 경향을 피해가려고 학원들과 숨바꼭질 한다."

- 민사고에는 주로 영재들이 입학한다. 공교육에서는 영재가 못 길러지고 꼭 사교육 받아야만 하는 건가.

"그게 참 대답하기 어려운데…(잠시 침묵) 과거에는 신입생 선발할 때 자격 기준을 뒀다. 국제반은 토플(CBT) 260점 이상, 민족반 240점 이상 받아야 지원자격 줬다. 이건 대단한 점수다.

미국에서 석박사과정에 해당하는 점수다. 중학교 막 졸업한 학생들에게 이런 점수를 요구하는 건 무리다. 요즘은 이 점수를 각각 20점씩 낮췄다. 그랬더니 밖에서는 학교 질 떨어지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웃음).

지금은 점수 하한선이 없다. 그냥 학생들을 선발한다. 그런데 하한선을 없애도 소용이 없다. 이미 아이들의 점수는 훨씬 높이 가 있다.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우선 이 학생들이 모두 외국에 가는 건 아니지 않나. 중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학생들이 토플을 만 점 받는 걸 어떻게 봐야 할지…. 물론 공부하면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런데 그건 학원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본인의 의지와 노력이 있어 야 가능하다. 우리 학교는 영어만 달랑 잘 하길 원하지 않는다. 작년인가에는 토플 만점 받은 학생이 떨어졌다. 어쨌든 점수 하한선을 두는 건 사교육 부추기는 것이다."

- 일각에서는 민사고가 경시대회를 치르면서 사교육 부추기고 있다고 하는데.

"사교육으로 실력 키워서 입학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 학원에서 준비된 아이들을 바라지 않는다. 과거 민사고 수학 경시 대회는 고2 수준의 공부를 마쳐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렇게 하지 않는다. 중3 교육 과정 내에서 출제한다. 사교육 시장은 계속 민사고 가려면 고2 수준을 마쳐야 한다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린 사교육 덜 받은 아이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관광객 길 안내하려고 영어 공부 하는 것 아니잖나"

- 인수위 쪽에서 영어 실력이 국가 경쟁력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보고 있나.

"심하게는 영어를 공식화 하자는 말도 있다. 분명히 세계화 글로벌 시대에서는 영어를 잘해야 싸움도 하고 협의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를 잘 하는 나라가 반드시 경쟁력이 높을까? 그것도 아니다. 필리핀 같은 나라를 보라.

영어 잘한다고 소문난 민사고 경험을 보자. 국어와 국사를 제외하고 다 영어로 수업한다는 이야기 듣고 교장 취임 전 학교에 와봤다. 외국인 교사가 영어로 수업하는데 잘 하더라. 내국인 교사들도 잘 했다. 교사 모임도, 조회도, 학생들 발표도 다 영어였다.

사실 나는 민사고 오기 전부터 영어 전용 수업에 회의를 갖고 있었다. 우선 언어 환경의 문제가 있다고 봤다. 두 세살짜리 어린아이 모아 놓고 우리말 하든지 영어 하든지 어른들이 관여하지 않으면 배울 수 있는 언어는 한계가 있다. 언어 구사의 수준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생들끼리 영어로 대화하라고 하고, 그걸 영어권의 사람들 보면 '베이비 톡스'일 수 있다. 즉, 어린애들 영어하는 수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 환경이 풍요롭지 못하면 언어 발달에, 영어 학습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언어 발달 과정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수준이면 학생들이 언어가 고급화 되는 시기다. 사용하는 용어도 확장되고, 우리말의 속뜻을 체득하게 된다. 또 사고도 복잡해 지고, 거의 성인 수준의 언어를 구사하는 시기다. 그 시기에 우리나라 말 제대로 못하게 하면 우리말 발달에 문제가 생긴다.

세 번째는 교사는 학생들에게 야단도 치고 칭찬도 하면서 지도를 한다. 그런데 영어로 대화를 주고 받아서는 사제지간의 정이 가슴에 와 닿겠나. 그리고 교사들도 영어로 말하게 하니까 말을 잘 안하더라. 회의에서도 침묵이 지배했다. 열렬히 토론을 해야 될 문제도 영어로 말하기 싫으니까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말이 고급화 되는 시기에 영어만 쓰게 하는 건 언어 발달에 문제를 불러온다. 그래서 민사고는 일요일 하루만 우리말을 쓰던 걸, 토요일까지 확장했다. 그리고 교사가 학생들 지도할 땐 우리나라 말 쓸 수 있도록 했다. 아침 조회할 때 교사들은 우리말 하게 한다. 물론 학생들은 영어로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영어를 배울까. 아이들은 왜 영어로 말을 해야할까. 관광객 만나서 길 가리켜 주려고? 그걸 하려고 하는건 아니지 않나. 국제무대에서 발표 하고, 회의나 계약할 때 당당하게 손해 안 보고 해낼 수 있는 그런 언어적 도구를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지금 인수위는 영어 정책을 계획을 갖고 추진했으면 좋겠다. 모든 국민이 똑같은 수준의 영어를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어떤 분야는 영어를 잘해야 하지만, 어떤 분야는 그렇지 않다. 내 생각에는 영어 등급 인정제를 했으면 한다.

5등급까지 있다고 치자. 초등학교 졸업한 사람은 5등급 영어를 패스하게 하고, 중학교는 4등급, 고등학교는 3등급 이렇게 등급을 둬서 졸업할 때까지 이걸 통과하게 했으면 좋겠다. 해당 등급을 통과하면 영어 성적은 더 물을 필요가 없게 하자. 필요한 사람만 더 공부하면 되는 것 아닌가."


2008.02.05 09:37 ⓒ 2008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