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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권 내는 김에 … 다시 고개 든 리디노미네이션



[중앙일보 2006-12-25]




이르면 2009년께 10만원권 등 고액권 발행 가능성이 커지면서 화폐의 액면 단위 자체를 변경(리디노미네이션)하자는 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은 한 나라의 화폐를 가치의 변동 없이 액면을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끌어내리거나, 아예 통화 단위와 호칭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현재의 1000원을 1원으로 바꾸고 그에 맞춰 모든 가격 단위를 조정하는 식이다.

한국은행이 박승 전 총재 시절 적극 주장했다. 재정경제부도 2004년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아직까지는 신중한 입장이다.

기대 효과에 비해 사회적 충격과 비용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점이 여전히 걸림돌이 되고 있다. 또 고액권 발행은 경제활동의 불편을 해소하는 차원이지만 리디노미네이션은 경제구조 자체를 건드리는 작업이어서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데 누구나 동의한다.

◆ 가열되는 찬반론=찬성론자들은 우리 경제의 대외적 위상을 도입 근거로 삼는다.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이를 만큼 커졌지만 화폐의 액면 단위가 너무 낮아 국제적으로 체면도 안 서고, 거래에 이런저런 불편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1998년부터 우리나라의 각종 거래 단위나 통계 수치엔 1000조(兆) 단위를 넘어서 다음 단계인 경(京) 단위(1 뒤에 0이 16개)까지 등장하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금융망의 연간 결제액은 3경원에 달한다. 반면 미국 등 대다수 선진국에선 통계와 거래 단위가 대부분 10억, 또는 많아야 조 단위로 표시된다.

한은도 이런 이유로 2004년 화폐제도 개선안을 정부에 제출할 때 고액권 도입과 함께 액면 단위를 1000 대 1의 비율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한은 발권정책팀 박운섭 차장은 "화폐 단위를 바꿀 경우 장부상의 기재나 지급과 거래가 훨씬 편해지고 우리나라 화폐의 대외 위상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반면 반대하는 쪽은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고 주장한다. 가장 큰 우려는 물가를 부추길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1000 대 1로 화폐 단위를 낮출 경우 소수점 이하는 반올림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생필품 값이 크게 뛸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화폐 단위를 변경하려면 화폐는 물론 회계장부와 전산 및 각종 통계 자료를 모조리 바꿔야 하는데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과 혼란이 만만치 않다. 따라서 지금의 경제 상황이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주장이 나온다. 일각에선 리디노미네이션에 따른 비용이 2조4000억~3조원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 다른 나라에선=우리나라에선 53년 2월 100원을 1환으로 바꾼 데 이어 62년 6월 다시 10환을 1원으로 바꾼 게 마지막 리디노미네이션이다. 2004년 한은과 국회에서 리디노미네이션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논란 끝에 다시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해외에선 60년대 이후 최근까지 총 41개국이 67차례에 걸쳐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했다. 대부분 아르헨티나.터키 등 과도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나라들이다. 간단한 생필품 하나 사는 데 백만, 천만 단위의 셈이 필요해지자 단번에 비율을 낮춰 계산상의 불편을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또 유로화 등 새 화폐 제도 도입을 이유로 이뤄진 경우도 있다. 2000년대 들어 유로화로 통화를 바꾼 유럽연합(EU) 내 12개 회원국을 비롯해 아프카니스탄.터키.루마니아.베네수엘라.짐바브웨 등이 화폐 단위를 바꿨다.

◆ 한다면 언제 하나=리디노미네이션의 시기와 관련해선 고액권 발행(2009년께)을 감안해 향후 적어도 1년 내에 결정을 내려야만 불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게 한은 입장이다.

고액권 발행을 위해서는 정부 승인과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인물 초상 등 디자인 확정(6~12개월), 인쇄 원판 제작(6개월), 인쇄(4~5개월) 등의 절차가 필요하다. 따라서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한다면 고액권 인쇄 원판 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방침이 정해져야 비용 낭비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액권 발행 이후에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한다면 새로 찍어낸 고액권을 얼마 쓰지도 못하고 폐기해야 한다.